Ⅰ. 밀재에서 한재까지 병풍지맥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우리 땅의 골간을 이루는 큰 산줄기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또 다른 골격들은 장백정간과 13개의 정맥으로 나뉘어 흘러 삼천리 금수강산의 피와 살이 된다.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으로 통한다'는 개념은 우리의 전통적인 지리인식의 바탕이었다.

우리 땅 산줄기의 모습을 오로지 태백산맥이나 노령산맥이니 하는 지질개념의 산맥이론으로만 인식해 온 우리에게 80년대 초반 홀연히 ‘산경표’로 부활한 백두대간은 놀라운 충격이다.

호남정맥은 백두대간이 설악산, 오대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나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백운산 가기 전 평범한 산줄기를 이루고 있는 영취산에서 갈래 쳐 내린 이후 온전히 전라남북도만을 누비는 산줄기로써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을 이루는 분수령을 이룬다.

큰 산으로는 장안산, 팔공산, 마이산, 만덕산, 내장산, 추월산, 산성산, 설산, 무등산, 천운산,제암산, 사자산,존제산, 조계산, 희아산, 도솔봉을 지나 전남 광양 백운산에서 끝을 맺는다.

도상거리 총 462km로써 이중 금남호남정맥 63.3km를 제외하면 순수한 호남정맥은 398.7km이며 행정구역으로는 장수,진안,완주,임실,정읍,순창,장성,담양,곡성,광주,화순,보성,장흥,승주,구례,광양 16개 시군을 지나간다.

본지는 대나무골을 병풍처럼 휘감으며 담양을 지켜온 호남정맥 탐사를 통해 산을 즐기고 배우려는 산악인들이 더 많이 생기길 바라며 건전하고 아름다운 산행의 정신이 지역사회 발전의 든든한 토대가 될수 있기 위해 담양구간 산행기를 기록코자 한다.(편집주 主)

1. 밀재에서 한재까지 병풍지맥

담양구간 중 첫 코스로 가장 험하기로 이름난 밀재-바심재-한재 구간인 병풍지맥(도상거리 17.2km)을 먼저 소개코자 한다.

담양과 순창의 경계 부근인 밀재에서 산행이 시작됐다. 초입부에 호남정맥을 알리는 표식기가 어지럽게 부착되어 있다. 동네 뒷산이나 야트막한 야산을 주로 공략 대상으로 삼아온 초보에게 녹록치 않은 산행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쳐온다.

밀재에서 바라본 산야는 산 정상에까지 이른 푸르름이 초여름 산을 풍요롭게 만들어 놓고 있다. 온 산을 빈틈없이 채운 녹음을 타고 넘는 바람에 일렁이는 숲속에는 뭇 생명들로 넘쳐난다. 갓 태어난 새끼를 키우느라 분주히 먹이를 물어 나르는 산새들의 지저귐만으로도 숲은 활력이 넘친다.

또한　초여름 산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하는 것은 넘실대는 바람에 층층이 꽃을 받치고 춤추는 층층나무, 꽃이 하늘을 향해 별처럼 반짝이는 산딸나무, 가지 아래로 무수한 흰 꽃이 핀 때죽나무, 하나같이 맑고 밝은 흰색인 이들 꽃들이 만개한 숲을 지나온 바람에는 싱그러운 향기가 넘쳐난다.

담양읍 어느 곳에서 지켜봐도 웅장한 자세를 잃지 않는 광덕바위에 떡하니 올라서 바라본 담양의 전경이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온다.

여유롭게 초여름 정취를 한껏 맛보기가 무섭게 흘러 내리는 땀이 이미 혹독한 산행에 들어선 것을 확인하게 하지만 등고선을 따라 제각각 피어있는 수많은 야생화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산행의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간간히 나타나는 호남정맥 표식기가 한군데 집중돼 있는 무연고 묘에서 일행은 좌측으로 목표를 정했다. 만약 표식기를 따라 산행을 했다면 장성 감상굴재로 이어지는 산행이 됐을 것이라는 상상만을 한채 이리저리 등산로가 엉킨 평탄한 소나무 숲을 지나자 경사가 급한 오르막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다.

벌써 봄꽃이 사라진 숲속에는 훌쩍 커버린 고사리 군락만이 호남정맥이 지나는 길에 자리 잡은 이름 모를 묘지를 우두커니 지켜주는 동반자 이자 계절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숨이 턱턱 막힌 2시간 산행 끝에 멀리 신계 정수장이 보이는 묘지에서 처음 휴식을 맞았다.

일본 북알프스를 산행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20kg을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체력 점검 및 독도법을 확인하기 위해 나선 전문 산악인들과 초보와의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타는 목마름을 냉수로 축이고 발길을 재촉한 끝에 발 아래 월산면 광암리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적이 끊긴지 오래된 등산로는 지독하게 우거진 가시넝쿨을 헤쳐야 했고 허리까지 차오른 잡풀도 복병으로 작용하고 이름 모를 벌레와 모기도 산행을 괴롭히는 훼방꾼으로 등장한다.

일행을 대표해 앞서가는 산꾼의 고행은 더하다. 시간당 3km를 산행하는 그이지만 밀림을 연상케 하는 빽빽한 잡목림과 이른 아침 먹이 사냥에 나선 거미줄과 칡넝쿨들이 바쁜 이의 속도 모르고 발목을 붙잡아 12시도 못돼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홍암마을 뒷산에서 체력을 보충할 점심을 한 후 멀리 보이는 용구봉을 향해 다시 산행에 나섰다.

10여분의 꿀맛 같은 오수를 즐긴 산꾼의 발걸음이 가벼워지자 뒤를 따르는 이들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밀림 같은 숲을 헤쳐 나온 끝에 임도와 만났다. 등산을 하는데 임도가 나타나면 괜히 부아가 돋는다. 잘 정비된 임도를 뒤로 하고 다시 숲으로 발길을 옮긴 끝에 월산 바심재 휴게소에 이르렀다. 휴게소에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원한 맥주 한잔과 컬컬한 막걸리를 한 순배 하고 도로 확장으로 이전한 충혼탑 뒤로 산행을 계속했다.

왕벽봉 정상이 가까워지자 녹색 창연한 여름이 한창이다. 정상을 30여m 앞두고 ‘은방울꽃’이 산 아래처럼 큰 군락은 아니나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백합과인 ‘은방울꽃’은 꽃이 작아 잎새를 뒤지지 않으면 꽃을 보기 어렵지만 향기가 좋아 고급향수의 원료로도 사용되는 ‘은방울꽃’이 꽃자루에 매달려 있는 모습에서 아름다운 종소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왕벽봉 정상에 다다랐지만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몽성산악회에서 세워 놓은 정상 표시만이 덩그러니 풀 한포기 없는 메마른 바위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청소년 수련관은 짙푸른 녹음을 타고 흰색의 층층나무 꽃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다. 초여름 산행에서만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오후 들어 급속히 체력이 떨어져 일행들의 발길을 더디게 한 것 같아 궁산지구 쪽으로 하산 목표를 정하고 발걸음을 향했다. 이 길은 오르는 길에 비하여 완만하면서도 군데 군데 바위가 있어 하산길의 즐거움을 더해줬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부엽토가 많은 등산로에는 어김없이 많은 야생초가 무리지어 자리 잡고 있다. 야생화 농원에서 자주 본 두루미천남성, 풀솜대 등 눈에 들어온다. 한 차례 급경사 오르막길이 끝나자 완만한 경사의 마사토가 있는 길이 나타난다. 조업이 중지된 월산면 광일석재와 한창 개발이 진행중인 수북면 궁산지구가 고개 하나로 명암이 엇갈린다.

멀리서 소음을 내며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인적이 들리면서 산행도 끝나 간다. 산을 내려선 곳이 궁산 택지개발 지구였다. 10시간에 걸친 기나긴 산행의 결과가 온몸의 뻐근함으로 남아있다.

당초 목적지인 대전면 한재까지 가기위해 천자봉(725m)-깃대봉(일명 신선봉, 822m) 구간을 돌파하고 완주를 한 일행들의 말을 빌리자면 함께 했던 구간이 미지의 처녀림이었다면 수북 야영장-병풍산 구간은 잘 다져진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사람들의 발자취로 번질번질 윤이 나 개발과 보존이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정체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고 전했다.

▲병풍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자봉과 왕벽봉. 멀리 추월산이 보인다.

이번 병풍지맥 산행에서 길을 잃지 않고 온전한 마루금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지도와 나침반을 갖추고 기본적인 독도법을 익혀 둘 필요가 있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먼저 간 다른 종주자들이 남긴 표식기가 안전한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게 한다.

/정종대 記者